2024. 04. 13., 부산 영도구 영선동4가 1210-47.

부서지는 윤슬만이 파랑의 경계를 낱긋고

지하철에서 내려 육교를 건너면서 누군가 매어둔 자물쇠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긴지 15년이 넘었습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살짝 맺힌 땀방울이 하늘을 쳐다보게 만들었고 파아란 하늘이 아까웠습니다. 메시지를 남겼어요. 우리 조금만 더 일찍 만나자. 날씨가 아까워서.

2024. 04. 13., 부산 사상구.

점심 때에 맞춰서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무도 없었지만 내 생각이 꽤나 많아 보였습니다. 깨끗하게 청소된 가스레인지 위에 닭볶음탕이 담긴 냄비가 올려져 있었어요. 닭이 신선해보인다고 말한게 이런 뜻이었나. 깨끗하게 청소된 주방과 따뜻한 음식을 한 가지 형태의 사랑으로 이해하도록 세뇌당하고 있습니다.

TV를 보면서 식사를 했어요. 설 즈음에 본가에 선물한 TV인데 실물로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습니다. 65인치의 화면이 안방 벽 한 쪽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빠가 생각나서 넷플릭스를 로그인 해두었어요.

일찍 만나자는 메시지가 무색하게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을 써버렸습니다. 샤워하면서 상상도 해야하고 화장하면서 노래도 불러야해요. 나는 여유롭게 준비할 때의 감정을 좋아해요. 여유롭기 위해서 상상도 하고 노래도 부르는데 오히려 바빠지는 것 같습니다.

2024. 04. 13., 부산 부산진구. 2024. 04. 13., 부산 부산진구.

3시 약속을 2시 반으로 주문했고 2시 45분에 서면에서 만나 함께 남포로 향했습니다. 사람이 반쪽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어진 대화는 서면역에서 남포역까지의 거리보다 길었어요.

2024. 04. 13., 부산 중구 용두산길 37-55.

한치모밀을 먹으러 ‘세정’에 가자는 것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오늘 하루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세정에 가기 위해서는 자갈치역에서 내렸어야 했지만 산책이 하고 싶어서 남포역에서 내리자고 했습니다. 벚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용두산공원에는 여름의 활기만이 가득했고 우리는 햇빛을 피해 카페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관광지 카페였지만 난간 너머로 보이는 바다와 부산항대교가 시원해보였어요.

살이 정말 많이 빠졌다는 이야기에 보톡스 효과를 많이 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관리에 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았습니다. 훈이 요즘 피부 관리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잠시나마 피부과 코디네이터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카페에서 메뉴가 늦게 나온 탓에 세정에 늦었습니다. 세시 반 즈음부터 가게 앞 태블릿으로 예약이 열리는 구조였는데, 정신 차려보니 시간은 4시였고 우리는 다급하게 자리를 옮겼습니다. 태블릿에는 50팀이라는 어이없는 숫자가 표시되고 있었고 예상 입장 시간은 밤 10시였습니다.

여섯 시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바다가 보고 싶었습니다. 영도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어요. 6년 전에 함께 갔었던 바다에 돌아가자고 말했어요.

남포동에서 흰여울 문화마을은 크게 멀지 않았습니다. 버스를 타고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어요. 6년 전에 비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가게들과 조용한 산책로가 있었던 동네가 변질된 것 같아서 아쉬웠습니다.

2024. 04. 13., 부산 영도구 영선동4가 1210-47.

바다와 하늘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바다는 푸르면서도 조용했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다섯시의 따뜻한 빛에 반짝이는 윤슬만이 바다와 하늘 사이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있었습니다.

2024. 04. 13., 부산 영도구 영선동4가 1210-47.

마을 아래 산책로 끝 터널을 지나가면 작은 몽돌 해변이 있습니다. 6년 전에는 동굴이 닫혀있어서 오지 못했었습니다. 동굴 앞 포토 스팟에 사로잡혀서 여기 까지 오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 같은 장소랄까요. 돌멩이들을 덮치는 조용한 파도가 내 마음도 잠재웠습니다.

2024. 04. 13., 부산 영도구 영선동4가 1210-47. 2024. 04. 13., 부산 영도구 영선동4가 1210-47. 2024. 04. 13., 부산 영도구 영선동4가 1210-47. 2024. 04. 13., 부산 영도구 영선동4가 1210-47. 2024. 04. 13., 부산 영도구 영선동4가 1210-47.

내 사진을 예쁘게 찍어줬어요. 내 측면에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서 신기했습니다.

저녁을 먹기 전에 남포동을 둘러봤어요. 오니츠카 타이거 매장에서 신발을 봤습니다. 엄마가 갖고 싶다고 한 신발이 있었거든요. 실물을 몇 개 확인해봤습니다. 닥터마틴 매장에서 샌들을 봤습니다. 요즘 닥터마틴을 좋아해서 살펴보는데 마침 매장이 있더라고요. 들어갔다가 샌들에 꽂혔습니다. 이번 여름에는 가죽 샌들을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급하게 든 생각이라 결제까지 이어지게 마음을 내버려 두진 않았습니다. 아, 8홀 워커를 신고 갔는데 매장에서 가죽 크림을 발라주더라고요.

2024. 04. 13., 부산 중구 광복로49번길 7 1층. 2024. 04. 13., 부산 중구 광복로49번길 7 1층.

낮에 어쩌다 똠양꿍 이야기가 나와서 저녁으로 태국 음식을 먹기로 했습니다. 대충 검색해서 찾아갔는데 가게가 없어졌더라고요. 어쩌지 하고 돌아다니다가 아무 노포에 들어갔습니다. 홍콩 영화에 나올법한 막 지은 건물의 느낌과 노포 특유의 간판 스타일이 날 이끌었어요. 나쁘지 않았습니다. 식당에서 나오는 길에 어떤 엄마가 딸에게 이 식당이 원래 2층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코노에서 노래를 부르고 세정에 도착했을 때 앞에 10팀이 있었고 우리는 9시 반이 되어서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2024. 04. 13., 부산 중구 중구로33번길 45 1층. 2024. 04. 13., 부산 중구 중구로33번길 45 1층.

6시간의 기다림 끝에 먹은 한치모밀은 정말 맛있었어요. 소스 자체는 막국수 소스여서 크게 특별하진 않았는데, 식감이 정말 좋았습니다. 한치를 얇고 길게 썬 다음에 아주 차갑게 해서 내어주는데 그로부터 느껴지는 말랑하면서도 단단한 느낌이 정말 맛있었습니다.

술을 곁들이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가 정말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2024. 04. 13., 부산 부산진구 동천로95번길 5 2층. 2024. 04. 13., 부산 부산진구 동천로95번길 5 2층.

2차는 전포에서 즐겼습니다. 버스를 타고 전포로 넘어가는 길에 술집들을 찾아보니 다 12시나 1시에 닫더라고요. 훈이 2시에 닫는 펍을 소개해줬고 그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가게 분위기가 아주 좋았어요. 아이리쉬 카밤이 있는 건 가산점이었습니다. 잭 허니 드래프트가 있길래 마셔봤는데 특이한 컵에 담아줘서 신기했습니다.

내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고 나는 진정을 위해 아이리쉬 카밤을 마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2시에 닫는 펍을 찾은 것이 무색하게 금새 자리를 옮겼어요. 칵테일바에 갔습니다. 메뉴 중에 마이타이가 눈에 띄어서 주문해봤는데 사장이랑 알바가 서로 어떻게 만들지 당황하면서 찾아보시더라고요. 메뉴판에 일단 적어두기만 해놓으셨나봅니다. 마이타이가 지금보다는 유명한 칵테일이 되면 좋겠어요.

새벽 다섯시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잃어버린 아이폰은 신발장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무계획에 급조한 하루가 나에게는 특별한 시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소중한 친구와 특별한 시간을 함께해서 다행이었습니다. 무계획 중에서는 바다가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바다에 잠긴 사연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윤슬을 만나 반짝일 수 있기를.

2018. 08. 14., 부산 영도구 흰여울길 121.


권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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